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문단 편집) ===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1341~1354) ===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9살의 [[요안니스 5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어머니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가 섭정하였고, [[요안니스 6세|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가 보좌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칸타쿠지노스의 막강한 권세를 시기했고,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도 칸타쿠지노스에게 제관을 받으라는 권유를 했다가 거절당한 뒤 오히려 칸타쿠지노스를 몰락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황후를 충동질한 끝에, 1341년 9월 23일 칸타쿠지노스가 [[아카이아 공국]]과 협상하기 위해 트라키아로 떠난 틈을 타 그를 반역자로 규정짓고 가족을 핍박했다. 그해 10월,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에게 지휘권을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를 거절했고, 1341년 10월 26일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 [[요안니스 6세]]를 자칭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은 제국에 심각한 내상을 안겼다. 요안니스 6세는 아이딘 공국의 투르크 용병대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의 후원을 받았고,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은 이에 맞서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교황의 지지를 호소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에도 지원을 호소했다. 안나 황후는 1343년 8월에 금화 3만 두캇을 빌리는 조건으로 베네치아 측에 동로마 제관의 보석들을 저당잡히는 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게도 아비뇽, 제노바, 베네치아 어디에서도 구원군이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섭정단의 핵심인 아포카브코스가 1345년 6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죄수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벌이다가 죄수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칸타쿠지노스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야심 가득한 스테판 두샨이 칸타쿠지노스에게 등을 돌리고 마케도니아 공략에 나섰다. 이에 칸타쿠지노스는 병력의 일부를 빼서 세르비아군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우무르의 아이딘 함대는 1344년에 출동한 교황의 동맹군에게 스미르나 항구를 빼앗기고 함대가 파괴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고 내전에서 하루속히 이기기 위해, 칸타쿠지노스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과 직접 만났다. 오르한은 칸다쿠지노스의 딸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는 대가로 칸타쿠지노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기기로 했다. 이후 오스만 베이국의 지원에 힘입어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 1347년 2월 2일 수도에 입성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두 황제는 향후 10년 동안 공동으로 제국을 지배하기로 했고 칸타쿠지노스가 선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두 황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기로 했다.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는 추방되었지만 다른 정치범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각자의 재산은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5월 21일 블라케르나이의 성모 성당에서 두번째 대관식을 치렀고, 1주일 뒤 칸타쿠지노스의 막내딸 [[엘레니 칸타쿠지니]]도 같은 성당에서 요안니스 5세와 결혼했다. 6년간의 내전 끝에 황제로 인정받은 [[요안니스 6세]]는 스테판 두샨의 영토 확장 정책, 1347년의 흑사병, 튀르크군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맏아들 [[마테오스]]에게 디디모티쿰과 크리스토폴리스 사이, 세르비아의 국경과 면해 있는 트라키아를 보존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차남인 마누일에게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한 그는 함대를 조직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 했지만 겨우 5만 히페르피라만 확보했고, 부자들은 더이상 희생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외국 상선들이 기존의 갈라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게 만들기 위해 수입 관세를 대폭 삭감했다. 갈라타를 도맡았던 제노바인들이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348년 8월 소함대를 파견해 황금뿔 주변의 동로마의 선박들에 불을 질렀다. 이에 칸타쿠지노스의 아내 이리니는 차남 마누일, 사위 니키포로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항전을 선도했다. 이후 양측은 몇 달 동안 격렬하게 싸웠고, 마침내 제노바는 제국에 전쟁 배상금으로 10만 히페르피라를 지불하며 그동안 불법으로 점유해오던 갈라타 뒤편의 토지를 반환했다. 또한 7년간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테살로니카를 탈환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을 지켜본 후 승자인 제노바와 화평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352년 무렵, 요안니스 6세는 사위인 요안니스 5세와 대립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젊은 황제는 더는 장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요안니스 6세는 이런 사위의 야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내란이 또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트라키아의 큰 몫을 떼어줬다. 그러면서 본래 트라키아를 영지로 삼았던 마테오스에겐 아드리아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영토를 할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을 빼앗긴 마테오스는 요안니스 5세를 미워했다. 그러던 1352년 여름, 양자는 또다시 내전을 벌였다.(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요안니스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처남인 마세오스의 영역을 침범해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했다. 마세오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은 이를 받아들여 기병 4천 명을 파견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다. 1353년 4월,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마세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라면서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상속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가족을 테네도스 섬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총대주교 칼리스투스는 마세오스의 대관식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요안니스 6세를 파문한 뒤 총대주교 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엔 제노바 측의 도움을 받아 테네도스 섬으로 도주했다. 마세오스와 그의 아내 이리니는 1354년 2월에야 비로소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마저 그 뒤에 이어진 눈보라와 홍수로 인해 사망했다. 한때 대도시였던 갈리폴리는 거의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튀르크군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트라키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요안니스 6세는 사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네도스 섬으로 갔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그가 탄 배를 받아주지 않았고 사위 역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1354년 11월 21일, 요안니스 5세는 테네도스 섬을 빠져나와 헬레스폰트를 빠르게 거슬러 가서 마르마라 해로 들어갔다. 11월 22일 이른 시각에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11월 24일 요안니스 5세는 장인과 만나 계속 공동 황제로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요안니스 6세는 12월 10일 블라케르나이에서 제관을 내려놓고 황제만 착용하는 예복과 자주색 장화를 벗은 후 은퇴를 선언하고 수도원에 은거했다. 황후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황후복을 벗고 키리아 마르타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에서 거점을 갖추고 있던 요안니스 6세의 맏아들 [[마테오스]]는 이에 불복하고 황제를 칭하며 매제인 요안니스 5세에게 맞섰다. 그러던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 그는 세르비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인들이 내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마테오스를 데려왔다. 이후 마세오스는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그의 아우 마누일이 있는 모레아로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